Q1. 글을 쓰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감사하게도 반브룩 스튜디오라고 제가 너무 존경하는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었습니다.
처음 맡은 일이 『위대한 유산』의 원서를 읽고 타이포그래피 포스터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제가 아무리 그 때 당시에 영국에서 5년 정도 살았었고 그래도 "영어를 조금 하네"라는 거만함을
가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원서를 읽고 문맥을 파악하여 포스터를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글자를 가지고 작업하는 데 정말 많이 혼났고, 디자인이 좋고 나쁘냐보다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많이 부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반브룩 스튜디오의 디자이너가
저에게 타이포그래피의 기본이 안되어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에요. 여기서 이 문장을 끊으면 안되는데
제가 엉망으로 해놓은거죠. 물론 저의 언어적인 미숙함도 있었겠지만,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해서 좋은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텍스트를 이미지로 보고 예쁘게 포장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닌, 문맥을 읽고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인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ㅤㅤㅤㅤ근데 그러려면 단순히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고 읽는 것은 굉장이 수동적인 태도이지만 쓴다는 행위는 문장을
창작의 능력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글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문맥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Q2. 언제부터 이렇게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셨나요?
20살 넘으면서부터 계속 글을 남겼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경험이 많을 때가 아니었어서, 저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전달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대학생 때 어떠한 교수님과 논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그 분이 제 나이 정도 되었었고, 워낙 디자인 업계에서 정말 슈퍼스타셨거든요. 그 분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저의 논리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생각했습니다.
ㅤㅤㅤㅤ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 두 문장이면 되는데, 글을 처음 쓸 때는 한 두문장으로 설명이 될 이야기들을 주절주절하게 되잖아요. 그러다보면 읽는 사람들의 집중도가 확 떨어져버려요. 제가 선생님과 논쟁을 할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나름의 훈련을 했죠.
Q3. 혹시 기록하는 습관이 디자인을 하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나요?
엄청나게 많이 주었죠. 제가 대학원때 하나의 프로젝트를 거의 6개월 이상 붙잡고 했던 적이 있어요. 그렇게 긴 기간동안 작업을 할 때면 내가 이것을 왜 시작했고,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며, 어떠한 표현방식을 거쳤는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어요. 하나의 프로젝트인데도 작업 일기가 꽤 길었는데,
이렇게 한 번 정리를 하고 나니까 작업의 논리와 과정이 정리가 되었어요.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분들과 작업 과정을 같이 끌고 가거나,
직원분들하고 작업을 할 때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됩니다. 또, 저희가 클라이언트들한테 제안서를 보낼 때에도 글을 많이 써요. 어떤 큐레이터분과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이런 작업을 하고 싶어요”
가 아니라 ‘왜 이런 작업을 하려고 하는지’ 생각을 정리해서 전달해야하잖아요. 이럴 때에도 도움이 되죠.
ㅤㅤㅤㅤ생각이랑 논리는 조금 달라요. 생각은 허공에 막 퍼져있는 것이라면, 논리는 생각을 모아 정리한 것이에요. 이런 논리는 작업의 바닥이 될 색과 중간 과정, 마지막 결과가 되며 이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작업을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면 글쓰기는 무조건 해야해요. 연애편지를 많이 써보세요. 글쓰기에 굉장히 도움이 많이 돼요.(웃음)
Q4. 그렇다면 글을 모두 모아 하나의 책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스튜디오를 시작할 때 거의 10여년 전에 안그라픽스 출판 쪽의 대표님과 지나가면서 이야기를 했었어요. “일상의 실천 10주년 쯤에 책 한번 내시죠.”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사실 대표님으셨지만 제가 까먹지 않고 “이제 책을 낼 때가 됐다.” 라고 말씀드렸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Q5. 목차가 모두 한글 자음으로 구성되어있고, 그에 맞춰서 10년동안 남겨왔던 기록들이 담겨져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10년동안 야금야금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라 제목을 그때 그때 정했었는데, 나중에 다 모아 놓고 보니 묘하게 흐름이 생기더라고요. 책의 처음은 디자이너의 실무와 예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끝은 개인적인 형이랑 할머니의 이야기로 끝나요. 그 구성을 폴더에서 보다 보니 되게 재밌어서 이것을 그대로 담으려고 했습니다. 또, 책이 특정 주제를 가지고 엮은 에세이집이 아니다보니 오히려 목차를 만드려고 하니까 더 어색했어요. 보통 책들이 제일 중요한 에세이를 가장 위에 올리고 그와 얽힌 몇 가지 에세이들을 묶어서 목차로 만드는데, 이러한 위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구분되어지게 하고 싶었어요.